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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교과서를 처음 펴낸 독립투사 - 김필순
우리말 교과서를 처음 펴낸 독립투사 - 김필순
  • 의사신문
  • 승인 2011.03.30 17: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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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슨 도와 의학 교과서 번역·독립운동 참여

김필순(金弼淳)
김필순(金弼淳)은 1878년 황해도 장연군에서 김성섬과 안성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일찍 개화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집안에 속하였다. 김필순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부터 언더우드등 선교사들과 자유롭게 접촉할 기회를 가져서 서울에서 신식교육을 받게 되었다.

언더우드집에 머물면서 배재학당에 입학했고, 4년 동안 학업을 마친 후 1899년 제중원에서 처음에는 셔톡스의 통역 및 조수로서 일하다가 1900년에는 자연스럽게 에비슨의 통역 및 조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에비슨을 도와 그레이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하였으나 불행하게도 화재로 인하여 원고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906년 해부학 교과서를 다시 번역하는 것을 필두로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 많은 책을 번역하였다. 김필순이 비록 영어를 잘하기는 했으나 책을 번역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에비슨은 그를 자기 옆에 두고 가르치면서 번역사업을 완수하였다. 이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 전에 이미 저학년 학생들의 강의도 담당하였다. 김필순은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하였다.

김필순은 의학도로서 병실 및 외래에서 보조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수년동안 병원경영에 관해서도 상세한 지식과 경험을 쌓았다. 당시 에비슨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 장차 세브란스병원의 책임을 맡고 한국의 의학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키우려했다.

1908년에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한 김필순은 에비슨교장의 전폭적인 후원에 힘입어 학교발전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이처럼 학교생활에 열심인 한편 기울어 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많은 우국지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특히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그를 도왔으며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김구 등이 조직한 비밀정치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던 김필순은 105인 사건으로 체포가 임박해지자 1911년말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만주 통화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모든 수입금을 조선독립군의 군자금으로 기부하였다.

그러나 통화가 점차 일본의 영향권에 들며 압박이 심해지자 1916년 몽골근처의 치치하얼로 도피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매입하여 평소 꿈꾸던 조선인을 위한 이상촌 건설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일본의 특무요원으로 생각되는 이웃 일본인 의사가 건내준 독약을 넣은 우유를 먹은 후 귀가 중 말에서 떨어져 1919년에 영면하였다.

김필순의 아들 김덕봉은 의사가 되어 간도 용정의 제창병원에서 근무하였으며 셋째 아들인 김염은 1930년대 중국영화계에서 활동한 유명한 배우로서 `상해의 영화황제'라는 호칭을 얻었다. 김필순은 1977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집필 : 황의호(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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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리뜨리 2013-01-30 11:32:49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여기까지 오게됐네요.

귀중한 정보 고맙습니다.